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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카이 다다토시 (155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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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사카이 다다토시 (1559년)는 사카이 마사치카의 셋째 아들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먼 친척이다. 형 시게타다와 함께 이에야스를 섬기며 고마키·나가쿠테 전투에서 공을 세웠고, 1590년에는 무사시국 가와고에에 3,000석의 영지를 받았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도쿠가와 히데타다를 수행한 후, 영지를 늘려 최종적으로 3만 7,000석을 다스리는 다이묘가 되었다. 1627년 6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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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카이 다다토시 (1559년)
인물 정보
씨족사카이 씨 (가가노카미 사카이 가)
이름사카이 다다토시
로마자 표기Sakai Tadatoshi
출생에이로쿠 2년 (1559년)
사망간에이 4년 11월 14일 (1627년 12월 21일)
계명대성원월계종식거사 (大性院月桂宗識居士)
묘소시가현모리야마시우키에 정의 겐쇼지
도치기현닛코시 산내의 린노지 묘도인 석가당
관위종5위 하, 빙고노카미
막부에도 막부
주군도쿠가와 이에야스히데타다이에미쓰
스루가다나카 번 번주 → 무사시가와고에 번 번주
아버지사카이 마사치카
어머니묘겐니 (石川清兼의 딸)
형제자매시게타다, 다다토시
배우자정실: 보쿄인 (寶鏡院, 스즈키 시게나오의 딸)
자녀다다카쓰
다다요시
다다시게
다다히사
다다스에
다다쓰구
딸 (다카기 마사쓰나 실)
딸 (가와이 무네토시 실)
딸 (미우라 요시마사 실)
가독 상속
직책가가노카미 사카이 가 다다토시 류 당주
임기1590년 ~ 1627년
대수1대
영지
다나카 번 번주 (가가노카미 사카이 가 다다토시 류)1601년 ~ 1609년
가와고에 번 번주 (가가노카미 사카이 가 다다토시 류)1609년 ~ 1627년
대수1대

2. 생애

사카이 마사치카의 셋째 아들이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먼 친척에 해당한다. 형 시게타다와 함께 이에야스를 섬기며, 고마키·나가쿠테 전투에서 큰 공을 세웠다. 덴쇼 18년(1590년)에 이에야스가 간토로 이봉되자, 무사시국 가와고에에 3,000석의 영지를 받았다. 게이초 5년(1600년)의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도쿠가와 히데타다를 수행했다.[1]

전후, 이에야스에게 7,000석을 가증받아 총 1만 석의 다이묘로서 스루가 다나카번으로 옮겨졌다. 1601년, 다다토시는 스루가 국의 다나카 번(1만 석)의 번주가 되었다. 게이초 14년(1609년), 더 나아가 1만 석을 가증받아 총 2만 석의 다이묘로서 가와고에로 돌아왔다. 1609년에는 영지가 무사시 국의 가와고에 번(3만 석)으로 옮겨졌다.[1] 게이초 19년(1614년)부터의 오사카 전투에서는 에도성의 루스이 역할을 맡았다. 그 후에도 여러 차례 가증되어, 최종적으로는 3만 7,000석을 영유하는 다이묘가 되었다.

간에이 4년(1627년) 11월 14일 사망. 향년 69세.

2. 1. 초기 생애

사카이 다다토시는 사카이 마사치카의 셋째 아들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먼 친척이다. 형 시게타다와 함께 이에야스를 섬겼다. 고마키·나가쿠테 전투에서 큰 공을 세웠으며, 1590년, 이에야스가 간토로 이봉되자 무사시국 가와고에에 3,000석의 영지를 받았다.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도쿠가와 히데타다를 수행했다. 전투 후, 이에야스에게 7,000석을 추가로 받아 총 1만 석의 다이묘로서 스루가 다나카번으로 옮겨졌다. 1609년, 다시 1만 석을 추가로 받아 총 2만 석의 다이묘로서 가와고에로 돌아왔다. 1614년부터의 오사카 전투에서는 에도성의 루스이 역할을 맡았다. 그 후에도 여러 차례 영지를 추가로 받아, 최종적으로는 3만 7,000석을 다스리는 다이묘가 되었다.

1627년 11월 14일 사망했으며, 향년 69세였다.

2. 2. 다이묘로서의 활동

사카이 다다토시는 사카이 마사치카의 셋째 아들이며,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먼 친척이다. 형 시게타다와 함께 이에야스를 섬기며, 고마키·나가쿠테 전투에서 큰 공을 세웠다.[1] 덴쇼 18년(1590년), 이에야스가 간토로 이봉되자 무사시국 가와고에에 3,000석의 영지를 받았다.[1] 게이초 5년(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도쿠가와 히데타다를 수행했다.[1]

전후 이에야스에게 7,000석을 추가로 받아 스루가 다나카번으로 옮겨져 총 1만 석을 다스리는 다이묘가 되었다.[1] 1609년에는 다시 1만 석을 추가로 받아 총 2만 석의 다이묘로서 가와고에로 돌아왔다.[1] 게이초 19년(1614년)부터 오사카 전투에서는 에도성의 루스이 역할을 맡았다.[1] 여러 차례 영지를 추가로 받아 최종적으로는 3만 7,000석을 다스리는 다이묘가 되었다.[1]

간에이 4년(1627년) 11월 14일, 향년 69세로 사망했다.[1]

2. 3. 사망

간에이 4년(1627년) 11월 14일 사망하였다. 향년 69세.

3. 가계

사카이 마사치카를 아버지로, 이시카와 키요카네의 딸 묘겐니를 어머니로 둔 사카이 다다토시는 스즈키 시게나오의 딸 호쿄인을 정실로 맞이했다. 장남은 사카이 타다카츠(1587-1662)이고, 차남은 사카이 타다요시(1589-1663)이다. 생모 불명의 자식으로는 사카이 타다시게, 사카이 타다히사, 사카이 타다스에, 사카이 타다츠구 등의 아들과 타카기 마사츠나, 카와이 무네토시, 미우라 요시마사의 처가 된 딸들이 있다.

4.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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